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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일본 자유주의 사관의 정체 1

뉴라이트의 국사교과서가 발간되어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뉴라이트 국사교과서의 역사관이 친일적이라고 비판의 목소리는 높았지만 정작 일본 우파의 역사관에 대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드네요...

친일청산, 일본 우익과 관계된 문제는 동아시아 전체의 문제이며,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리더쉽을 발휘하기 위해서도 과거사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고, 일본의 과거사를 용서하고, 덮어버리자는 뉴라이트의 태도는 모순적입니다.

그래서 좀 늦었지만 멕코맥(McCormack) 호주국립대학 태평양학 연구학부 동아시아 교수가 1997년 '창작과 비평' 98호에 기고한 '일본 자본주의 사관의 정체'라는 글을 순차적으로 옮겨 봅니다(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일본 우익의 입장은 10년전과 동일해 보입니다).

1. 자유주의적 역사기술과 올바른 역사
2. 위안부의 도전: 끔찍한 성범죄의 나라
3. 사람과 운동
4. 이해와 해석을 위하여 
5. 결론


1. 자유주의적 역사기술과 올바른 역사

반세기 전에 끝난 전쟁에 대한 책임문제가 그 전쟁이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지금, 일본한테 점점 더 급박한 문제가 되고 있다. 이 문제를 두고 생긴 사회적, 정치적 균열은 깊어가고 있으며, 그 국제적인 파급도 점점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 이후로 일본의 식민주의와 침략의 희생자 편에 서서 일본의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법적 소송이 토교의 재판정에 수십건 씩 쌓이고 있다. 이들은 종군 위안부, 난징 등지의 대학살의 희생자들, 전시징용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 그리고 일본이 중국에 사용한 생물학적, 화학적 공격의 희생자 및 그 가족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문제는 위안부 문제일 것이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률가위원회는 1994년 위안부 보고서에서 어린 소녀들을 포함한 수많은 여성들이 전시 일본의 군사시설에 강금되었을 뿐만 아니라, 구타와 고문을 당하였고 반복적으로 강간을 당하였음을 지적한 바 있다. 1996년 2월 유엔의 인권위원회는 '위안부'를 '성적 노예'로, 이 여성들에게 일본이 저지른 짓은 '반인륜적 범죄'로 규정하였다. 이 위원회는 일본이 희생자들에게 보상할 것과, 공소시효에 상관없이 책임자들을 처벌할 것, 아울러 일본은 교육과정에 이 역사적 사실들을 포함시킬 것을 촉구하였다.

서울과 마닐라, 자카르타 등 과거 '대동아공영권'에 속했던 많은 도시에서 분개한 여성들이 대대적으로 일어나 50년 전 그들이 겪은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국(남북한 모두), 필리핀, 중국, 태국,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이름을 밝히면서 자기들이 겪은 일을 글로, 혹은 말로 증언한 여성들이 1997년 초에는 이미 2만 3천명에 달하였다. 전쟁을 반성함에 있어 초점은 이렇게 변하였다. 논제를 규정하고 토론해온 것이 항상 남성들-정치가, 군인, 학자-이었던데 반해, 1990년 초부터는 50년간의 침묵 끝에 여성들이 나서서 일본을 향하여 어마어마하게 심각한 도덕적, 정치적 문
화적인 질문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1996년 12월 미국 법무성의 범죄국은 전범이라 여겨지는 일본인들의 이미 '부적격 명단'을 마련하였다고 발표했다. 그 명단에 들어 있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12명 가운데 3명은 위안부 조직과 관련이 있고, 나머지 9명은 중국에서 미생물전을 행하고 죄수들을 상대로 수많은 참혹한 죄를 저지른 하얼삔의 731부대 소속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말하자면 사건이 있은 후 50년이 지난 지금 워싱턴은 일본인들을 나찌전범과 마찬가지로 취급하기로 결정한 것이며, 이것은 그들의 범죄가 유달리 혐오스러워 이에 가담한 혐의가 있는 자들은 공소시효의 보호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선언한 셈이다.

일본 내에서도, 국가기관 차원에서 이 문제를 타결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에서 자민당의 장기집권이 처음으로 무너진 1993년 수상은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이 침략전이며, 식민전이었다고 인정했고, 1995년 의회는 위안부 문제에 관하여 정식으로 유감을 표명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일본 군인들을 위한 '위안소' 설치 및 운영에 국가기관이 개입하였음이 시인되었고, 정부는 그곳에서 일하던 대부분의 여성들이 강제로 그런 생활을 하게 되었음을 시인하였다. 명목상으로는 민간기음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국가기관의 막강한 지원을 받은 생존 위안부에 대한 보상기금이 마련되었고, 1990년애는 희생자 중 일차적으로 몇 사람의 여성들에게 위로금과 함께 수상이 쓴 구체적인 사과 편지 또한 전해졌다.

그러나 이같은 온건한 해결책에 명렬하게 반대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의회에서는 그들의 전쟁이정당한 명분을 가진 정쟁이었으므로 어떤 사과도 필요치 않다고 주장해온 자민당 의원들이 1994년 12월 (전문교부정관이었던 오꾸노 세이스께를 필두로 하는) '종전50주년 국회의원연맹'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의 이름으로 1995년 8월 다양한 행사들이 개최되었다. 이 가운데 '아시아 공생의 제전'이라는 행사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 대표를 초청하여 "전몰자에게 감사하고,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의 독립에 기여한 바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1996년 4월 이 모임은 '밝은 일본 국회의원연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에 대응하여 야당인 신진당(오자와 이치로가 이끄는 보수파 당원의 일부는 1993년 자민당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임) 의원들은 1995년 2월 (오자와 타쯔오의 주도하에) '올바른 역사를 전하는 국회의원연맹'이라는 모임을 결성하였다.

의회 바깥을 보면, 이 두개의 의원모임은 10981년에 결성되어 1990년대에는 작곡가 마유즈미 토시로오에 의해 주도된 '일본을 지키는 국민의회'와 전국적으로 긴밀한 공조를 이룬 것이었다. 국회 안팎의 민족주주의 단체들은 대체로 전통 우파나 민족주의 성향을 띤 일본유족회, 통일교와 그 산하조직인 '평화교수협의회', '세계승공연맹' 그리고 '성장의 집' 같은 종교단체들이 있었다.

그러나 1990년 중반 무렵에 달라진 것이 있다면, 토오꼬 대학 교수인 후지오까 노부까즈가 1995년과 1996년에 꾸려낸 '자유주의사관 연구회',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같은 전국적 조직들이다. 이 새로운 조직들이 불만에 찬 많은 학생과 교사, 연구자들을 전선으로 결집하여 국회 안팎의 우익 민족주의 세력들 곁에 세울 수 있다면, 그들의 영향력은 상당해 질 것이다.

후지오까가 중심인물이기는 하지만 그와 그가 내건 대의명분은 문인, 언론인, 학자, 사업가 등 광범위한 집단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여기서 눈에 띄는 역할을 한 사람은 만화가인 코바야시 요시노리와 독문학자인 니시오 칸지이다. 그들의 운동은 일본민족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재평가하는 일과 그 중에서도 특히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위안부'를 언급하는 조항을 삭제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들은 이미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오른 일련의 저작들, 예컨대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오욕의 근현대사" 같은 책을 출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교과서를 만들어 보급하려는 의지도 갖고 있다(결국 후소샤 교과서가 발행되어 일부지만 교과서로 활용되고 있음을 추가합니다). 대중잡지들은 이들의 분석과 활동을 정기적으로 다루었고, 전국 규모 일간지인 산께이신문도 이들을 활발하게 보도하였다. 코바야시 요시노리의 만화는 잡지 "사피오"(SAPIO)에 연재되어 젊은 층의 인기를 얻었다. 전쟁 기억과 교과서 문제, 그리고 특히 '위안부' 문제에 관한 밤샘 토론회가 1997년 2월 1일 아사히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는데, 이 토론회에서 후지오까와 그의 동료들은 이름난 역사학자 및 자신들과 반대되는 명분을 이하여 싸우는 단체의 대표들과 토론을 벌였고, 이는 당시 가장 주목할 만한 언론이벤트였다.

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선택함을써 후지오까와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진부하고 해결점 없는 전후 담론의 양극단으로부터 탈피한 뭔가 새롭고 신선한 입장인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혹자는 이런 탈피가 1990년대 중반에 어차피 시도되고 있었고, 따라서 후지오까의 작업은 불필요하거나 장애물이 되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전쟁책임을 인정하고 (전쟁피해자에게 줄) 보상금을 확보하는 일에 대해서 - 1993년 호소까와 수상이 선언한 이후로 현재 수상인 하시모또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입장인데 - 국민적인 동의가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지오까는 이런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보기에 역사적인 상는 아직고 좌우 이분법에 갇혀 있고, 그의 '자유주의적 입장'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대중소설가인 시바 료오따로오의 표현을 빌려 그는 이러한 이분법을 '좋은 편과 나쁜 편'이라 부른다. 한편에는 이른바 '토꾜 전범재판식 역사관'이 있다. 이것은 전전과 전시의 일본을 좋은 편인 미국과 비교하여 나쁜 편으로 보는 역사관으로 미군정에 의하여 일본에 의해 강요된 정통사관인데, 후지오까 가 믿기로는, 그후로는 좌익 역사학자와 교육자들 덕분에 일본ㅅ람들이 이 사관을 내면화하기에 이르렀고, 심지어는 자민당까지도 이에 휘둘려 근본적으로 잘못된 1990년대의 사과의 정치를 벌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립하는 다른 시각으로는 흔히 '대동아 전쟁 긍정론'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의 가장 유명한 대변물은 역사학자 하야시 후사오의 1969년의 연구작업일 것이다. 그는 이 연구에서 아시아의 해방을 달성하는 데 일본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후지오까는 이 두 사관 모두를 거부한다고 공언했지만, 실제로는 그의 포화는 전자에만 집중되고 있으며, 그러는 사이 그와 그의 동료들은 하야시가 30년 전에 외쳤던 바로 그 긍정론에 더욱 근접해왔다. 새로운 차원의 객관성을 달성하고 상대주의적이며 다양한 인과관계의 틀을 밝혀내겠다는 자유주의의 약속은 아직 지켜지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후지오까의 메시지가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는 점은 어떤 의미에서 그가 옳을 수도 잇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많은 사람들은 50여년의 긴시간 동안 아무런 해결의 기미도 없는 (혹은 그렇게 보이눈) 교착상태에 지쳐 있었고, 반세기도 더 지난 일을 놓고 아직도 책임소재를 묻고 보상 운운하는 것이 짜증스러운 상태였다. 많은 사람들은 또한 이제 전지구적 경제초강국이 된 일본의 위치에 걸맞는 긍정적인 정체성과 역할을 원하는 듯하다.

자유주의라는 딱지라든지 한결 뛰어난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주장을 제쳐놓고 보면, 후지오까와 그의 동료들의 메시지의 핵심에는 '일본 고유의 역사의식'이 희미해졌다는 개탄에서 비롯된  역사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책임은 이들이 전후의 정통적이고 '자학적인' 역사관이라고 부르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객관적이고 열려있는 상태에서 인과관게의 다양성을 찾는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 그들은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역사는 상이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진리나 증거 같은) 내적인 기준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역사는 그것이 일본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궁극적인 도덕적 과제에 종속되는 것이다. 특히 그들은 1997년 4월부터 사용하도록 승인된 역사교과서에서 '위안부 강제연행'(그리고 난징대학살과 그 밖의 다른 잔혹행위까지)을 언급하는 것에 강하게 반발한다. 이런 내용을 교과서에 싣는 것은 그들 생각에는 '우리의 독자적인' 역사관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교과서는 '올바른 역사'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후지오까가 정치적 '올바름'을 호소하는 자신의 입장을 그런 입장과 상반되는 포스트 모던 상대주의의 기치하에 피력하면서 그 모순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나, 그가 아주 진지하고 중요한 사상가로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는 사실을 보면, 일본의 담론이 얼마나 바깥 세상과 어긋나 있는 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올바른 역사'가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통용될 것을 주장함으로써 후지오까는 억압해야 할 '그릇된 역사'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시사한 셈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반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좋은 편/나쁜 편'의 이분법을 다시 불러들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밖의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 즉 정치적으로 옳은 것을 지키는 수호자의 반열에 스스로를 올려 놓은 셈이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위험한 사상들'을 제거하고 참되고 영광스런 일본제국의 역사를 강요하는 데 헌신한 전전의 관리들은 모두 '자유주의자'였던 셈이다.


'일본 자본주의 사관의 정체'"2. 위안부의 도전: 끔찍한 성범죄의 나라 일본'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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