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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일본 자유주의 사관의 정체 3

뉴라이트 친일교과서가  나오고, 한나라당을 통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일본 우익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객관적인 입장에 있다고 생각되는 호주국립대학 태평양학 연구학부 동아시아학과의 맥코맥(McCormack) 교수의 글을 옮겨 봅니다(일본 자본주의 사관의 정체, 1997년 '창작과 비평' 98호, 1997)

1. 자유주의적 역사기술과 올바른 역사
2. 위안부의 도전: 끔찍한 성범죄의 나라
3. 사람과 운동
4. 이해와 해석을 위하여 
5. 결론
 
3. 사람과 운동

그렇다면 후지오까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그가 벌인 운동과 그 운동의 계보는 어떤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인가?194년에 태어난 후지오까는 전쟁이 패배로 접어들 바로 그 무렵 '노부까쯔', 즉 '승리확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젊은 시절 그는, 스스로 술회하기를 좌익집단과 관계있는 '일국평화주의'를 신봉하였고, 훗카이도 대학에서 연구하던 시절 교육방법론을 전공하는 학자로 어느 정도 평판을 얻었다. 1980년대 초반 그는 토오꼬오대학으로 옮겼지만 럿거스대학에서 1년간 문화인류학을 연구하고 돌아올 때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 1년간 그는 '전향'이라고 불릴 만한 일종의 위기를 경험하였다. 걸프전에 대한 일본의 대응방식에 수치감을 느낀 그는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의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jsut and unjust wars)이라든가 리처드 마이니어(Richard Minear)의 승자의 정의(Victor's Justice) 같은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마이니어를 읽은 후, "내 눈에서 꺼풀이 한겹 떨어져 나갔다"고 그는 술회했다. 그가 보기에 일본은 "국가로서 그 안녕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하였다. 그는 '대동아전쟁'을 '정당한 전쟁'으로, 전후 일본의 평화헌법을 일본을 속박하는 굴레요 일본 고유의 민족주의적 감각의 출현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보게 되었다.

그가 서술하는 경험은 지적인 것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정서적인 (또는 종교적이기까지 한) 경험이기도 해서, 거기에는 논리적인 일관성이 전혀 없다. 절충주의가 진정 그 특색이다. 그에게 영향을 준 일본인들 가운데 그가 가장 큰 비중을 두는 인물은 이시바시 탄잔(1884-1973, 신문편집인 정치인으로 1-2차 대전 사이에 유명한 자유주의자였음), 시바 료오따로오(1923-1995, 유명한 전후 소설가로 주로 역사적인 주제를 다룸)이다. 그러나 후지오까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이시바시는 바로 '자유주의'에 입각해서 1920년대에 일본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일본이 식민지 침탈을 중지하고 '소일본주의'를 유지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 사람이었다. 또한 메이지시대를 그토록 생생하게 극화함 시바 역시, 훚;오까가 열렬히 찬탄하는 작품 <언덕 위의 구름>에서 러일전쟁의 위대한 민족주의자 영웅인 노기 장군을 냉정하고 신랄하게 그려냈을 뿐 아니라, 20세기 제국주의국가 일본에 동조할 생각을 전혀 갖지 않았고, 특히 1930년대의 중일전쟁을 가리켜 '부당하며 의미없는' 전쟁, '침략적 전쟁' 또는 석유와 자원을 차지하려는 식민전쟁이라 부른 것이다.

후지오까가 묘사하는 좌우익을 넘나드는 궤적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지만, 그의 기술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자신의 변모를 좌우대립의 역사적 교착상태를 넘어서려는 시도로 그려낸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2차대전 전에 일본이 치른 전쟁들을 무비판적으로 긍정하고 있으며, 그가 사용하는 '자유주의'라는 딱지를 빼면 그의 사관을 전통적인 우익사관과 구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론적으로 일관성이 없지만 그의 견해는 새로운 자유주의 역사관이 아니라 낡은 황국사관이다. 뿐만 아니라 이전의 '전향자'처럼 후지오까 역시 우익으로 다시 태어난 다음에도 '좌익' 시절의 구조중심적 사고와 '선전선동'(아지프로)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즉, 구조를 우선시하는 성향 때문에 한때 일본 공산당의 공식적인 노선에 의존했던바, 그런 그의 성향은 개종 이후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그러나 마찬가지로 독단적이며, 독선적인 형태의 '올바름'을 구성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새로운 '자유주의'의 '지적' 기반이 이렇게 후지오까와 니시오 등에 의해 구축되는 사이에, 지역과 거리에서 벌어지는 캠페인도 이에 보조를 맞추어 진행되었다. 이들 운동의 특징은 전전이나 전후의 우익집단 및 국수주의 집단이 흔히 구사한 위협과 폭력을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자유주의적'인 그 어떤 요소도 결코 그 안엔 없었다. 교과서 출판업자들에게 여러가지 협박성 요구가 쏟아졌다. 우익전위대를 실은 트럭들이 군가를 울려대고 위협적인 구호를 외치며, 비위에 거슬리는 출판사들을 에워쌌다. 반일본적 교과서의 저자들과 출판사의 이름이 '자유주의사관; 책들과 팜플렛에 대서특필되고 교과서 저자들이 사는 주택의 확대사진이 살포되는 등 이들은 명백히 위협적인 의도를 드러냈다. 1960년 사회당 당수 아사누마 이네지로오를 암살한 극우극렬분자를 애국지사로 칭송하는 책들이 출판사에 배달되고, 1987년 아사히신문사를 습격한 (이 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다) 세끼호오따이 같은 파시스트 폭력조직들이 후지오까를 지지하였다. 이 모든 현상들 중 새롭다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후지오까와 그의 동료들이 언론을 향해 경고와 항의를 퍼붓고 문부성에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압력을 행사하였지만 그들의 캠페인은 명백히 실패였다. 지방자치단체들을 끌어들여 토오꼬오에 교과서 개정요구를 퍼붓게 하려고 온 힘을 기울였지만, 단 하나의 현(오까야마)과 작은 지방자치단체 11곳만이 이 결의문을 토오꼬오에 제출했을 뿐 나머지는 결의문 초안을 간단히 보류했다. 더욱이 오까야마현의 조치는 현의 주민들, 특히 여성들에게 매우 놀랍고 충격적인 것이어서 다른 곳에서 이 캠페인이 성공하는 것을 저지하려는 전국적 운동이 곧 꾸려졌다.

바로 이전의 전쟁과 기억에 관련된 명분들말고도, 이들의 새 전선에서 활발하게 사업을 벌인 분야들이 있었다. 이들은 학교에서 성교육을 실시하는 데 반대하며 (이들은 특히 '순결교육'을 강조한다), 결혼한 여성들이 본래 자신의 성(姓)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나 그밖의 다른 '가족문제'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개헌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도모하는 것도 과제로 남아 있다. '위안부' 문제, 도덕문제, 가족문제 및 '밝은' 역사와 국가적 정체성을 창조하는 과제들을 중심으로 성공적인 제휴를 이끌어 낸만큼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조직체의 출현을 예견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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