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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2mb

YS와 MB는 닮은 꼴

이 글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존칭은 생략하겠습니다. 그의 시각으로 저는 어차피 버릇없는 국민의 한 사람일 뿐일테니까요~~(사실 존칭을 쓰기조차 아까워서..)

김영삼씨 촛불정국 속에서, 개념 없이 나서서 막말을 내 뱉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30일 촛불시위와 관련해 “대통령의 5년 임기가 헌법에 의해 보장돼 있는데, ‘그만 두라’는 게 말이 되느냐” “완전히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정부의 강경대응을 주문했다.YS ‘촛불 버릇 고쳐야’ 정부에 주문, 2008-06-30, 한겨레(김영삼씨는 거리로 나오신 사제단 신부님들을 어찌 생각하실지?)

절대로 국민에게 '이래라 저래라'해서는 안되는 인간이 우리나라에는 있다면, 그 중 한 사람은 분명 김영삼씨라고 생각합니다.

김영삼씨, 이 분의 화려한 전력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명박과 닮은 꼴이네요~~

1. 3당 합당
90년 여당인 민정당(총재
노태우)
의 의원수보다, 야 3당의 의원수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90년 1월 22일 김영삼(통일민주당)씨는 독재정권의 독주를 막아야 한다는 국민들의 뜻을 무시하고 김종필(신민주공화당)씨와 함께 민정당으로 기어들어가 버렸습니다.
김영삼씨는 '대통령 한번 해보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3당 합당으로 표출하였습니다. 결국 김영삼씨 덕분에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90년대 시작과 함께 퇴보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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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경향신문에서 : 3당 합당 기자회견?>

-> 이명박
궁지에 몰려 한나라당, 친박연대, 자유선진당을 끌여들여 보수대야합을 추진하려다 면박만 당했습니다. 김영삼씨에게 배웠나?(
보수대야합, 민자당 출현 연상, 2008-06-17, MBC)


2. 쌀 시장 개방
김영삼씨는 '대통령직을 걸고 쌀 개방만은 막겠다’고 공언했지만 우루과이 라운드(UR)를 이유로 93년 말 '최소시장접근(MMA) 방식에 의한 쌀 수입'에 합의하고, 94년 2월 쌀시장을 개방해 버렸습니다.
당시에도 쌀 시장 개방에 대한 재협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그리고 김영삼 정권은 역시나 재협상 불가 방침을 내세웠고.....하지만 은근슬쩍 최종이행계획서를 수정, 제출하면서 재협상 불가 방침을 스스로 위반했습니다. 김양배 당시 농수산부장관은 UR이행계획서를 일부 수정한 데 대해 “재협상을 한 것이 아니라 일부 시행령을 고친 데 불과한 것”이라고 말장난을 했습니다.(
2004년 쌀시장도 당하나, 2002-08-08, 주간동아)
우르과이 라운드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적(GATT)의 제8차 다자간 무역협상으로 WTO 체제의 기초가 되었던 국가들간의 협상이었습니다.

-> 이명박
한미 FTA 체결을 위해 한미 쇠고기 협상을 졸속으로 처리한 후, 재협상은 절대 안된다고 버티고 있습니다. 그리고 추가협상으로 완벽해졌다고 말장난을 하고 있습니다.

3. 교육 개혁 ?
김영삼 정권은 1995년 5월 31일 5·31교육개혁안을 발표했습니다. 5·31교육개혁안의 핵심전략은 교육소비자의 선택권을 위한 공교육 시장화와 자립형 사립고등학교 설립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무분별한 경쟁원리 도입으로 교육불평등이라는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결국 교육혁신방안 수립 자체가 지체되다가 일부만이 추진되었습니다.(
‘교육자율화’는 결국 ‘교육시장화’, 2008-07-01, 시민사회신문)

-> 이명박
김영삼씨보다 한술 더 떠서 '영어몰입 교육', '자립형 사립고 100개 설립' 등을 주장했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몇줄 안되는 글에 오타만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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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외수 선생님 홈페이지에서(
http://www.oisoo.co.kr/)

4. 세계화(Segyehwa)
국내외적으로 국제화(Globalisation)이라는 단어가 통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김영삼씨는 1994년 APEC 회의에서 돌아오자 마자 세계화를 얘기했습니다.
세계화라는 있지도 않은 말을 김영삼씨가 만들어 내자 공무원과 국민을 비롯하여 외신기자들까지 혼란에 빠졌습니다. 결국 공무원들은 Segyehwa라는 영문 표현을 만들고 개념 정의까지 하는 촌극을 빚었습니다.

                                             <세계화의 영문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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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기록포털(
http://contents.archives.go.kr/)에서

-> 이명박
취임초 발표한 국정과제를 통해 글로벌 코리아라는 화두를 던지고 그 속에 글로벌 코리아와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한반도 대운하'와 '한미관계의 창조적 발전'을 집어 넣었지만~~국민들의 원성만 높아가고 있습니다(
국정과제 살펴보기 3-글로벌 코리아)

5. 결국 IMF
김영삼씨는 대통령에 취임 직후인 93년 '신경제 100일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추진배경이 더 가관입니다. 92년 GNP 성장률이 4.7%에 머물자, 저성장 경기침체라고 단정하고 규제완화와 경제활성화를 위한 총수요 확대정책 등 경기부양 정책을 강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OECD 가입을 위해 무리한 금융자유화를 시행하면서 제도적 무방비 상태에서 외국 투기자본을 끌여들였습니다.

결국 임기 초부터 시작된 경기과열과 금융제도 자유화는 IMF 금융위기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97년 12월 IMF 금융위기 외환위기가 도래하자 김영삼 정권은 IMF에서 긴급자금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노동시장 유연화와 금융개방 등 강력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받아들였고, 한국 경제는 사실상 ‘신탁통치’ 상황에 돌입했습니다.
이 때부터 양극화는 시작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IMF 반대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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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경향신문에서> 아니 IMF 시기에도 재협상 !!

-> 이명박
경제성장률 5%에 만족하지 못하고 7%까지 끌어 올리겠다는 이명박의 대선공약(空約)747 정책, 유가인상 대책으로 10조를 국민들에게 살포하겠다는 유가정책 등등이 90년대 김영삼 정권을 연상시킵니다.

6. 마치며
김영삼씨는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서민들을 피곤하고 만들었고, 결국 국가를 IMF 체제로 몰아 넣은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반성은 커녕 전직 대통령이라며 때마다 등장해서 국민들에게 막말을 해대고 있습니다.

이런 김영삼 정권과 이명박 정권은 닮은 꼴처럼 보입니다.

p.s.
사제단이 '대통령의 힘과 교만을 탄식'하는 시국미사를 진행하던 날
김영삼씨는 국민들의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부끄러움도 잊은채 떠들었습니다.
 
그리고 김영삼씨 제발 자신의 버릇부터 고치세요~~이명박이 보고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