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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2mb

용산참사를 대하는 법원의 편향된 태도

지난 2009년 1월 20일 용산 재개발 지역에서 용역회사와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6명의 무고한 생명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용산참사에 대한 진상 조사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에 대한 재판만 진행 중입니다.

진실도 제대로 밝혀지지 못한 채,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 자체가 모순이지만
이보다 더 모순된 일이 재판정에서 진행되고 있는 듯합니다.

1. 무산된 국민참여재판(용산참사 국민참여재판 기각, 2009-03-27, 한겨레)
먼저 철거민 4명이 제기한 국민참여재판 신청이 기각되었습니다.
검찰은 60여명의 증인을 신청하였고, 재판부는 검찰의 증인신청을 받아들이면서 국민참여재판 신청은 기각되었습니다.  
기각 사유는 증인 숫자가 너무 많아 재판이 장기화될 수 있으며, 이 경우 생업에 종사해야할 배심원단의 부담이 가중된다는 이유였습니다.

검찰과 법원의 방해(?) 용산참사에 대한 판단을 국민과 함께하려고 한 철거민 변호인단의 바람은 일순간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검찰이 증인수를 줄이거나, 법원이 증인수를 조정했다면 충분히 국민참여재판으로 갈 수 있는 사안이었지만, 다시금 용산참사가 사회적 이슈화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용산참사의 국민참여재판은 무산되었습니다.

2. 중립성이 의심되는 법원(유독가스 공격 용산 용역 정당 행위, 2009-03-31, 연합뉴스)
용산참사를 담당하고 있는 판사는 "사건이 워낙 이슈화가 돼서 그렇지 (불을 피워 유독가스를 철거민에게 보낸) 사안 자체는 별 거 아니지 않나. 제 생각에는 이거 자체는 별 문제가 아니지 않나 싶다"며 재판을 조정하고 있습니다(아래 기사 참조). 그러면서 변호인에게는 증인 수를 줄이는 등 재판을 가급적 신속히 진행하자는 취지의 주문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국민참여재판을 기각할 때에는 과도하다고 여겨질 만큼 많은 검찰측 증인을 인정했던 법원이 철거민 변호인 측에게는 증인 축소를 종용하는 듯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3. 외로운 용산참사 유가족
경찰은 용역직원들과 함께한 폭력적인 철거작전을 무마하려는 듯, 서둘러 사망하신 분들의 부검을 서둘러 끝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찰은 MBC 100분 토론 게시판에 조직적으로 들어와 여론을 호도했고, '강호순 사건'을 이용하라는 청와대의 조언까지 받았었습니다.

이에 대해 검찰은 진실을 밝힐 의지를 보이지 않고, 수수방관 조용하게 재판을 진행하려고 국민참여재판을 방해하였습니다.

여기에 재판과정에서 법원마저 중립성을 상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 촛불재판 과정에서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모습을 보여준 법원..... 
용산참사에 대해서도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까요?

6명이나 되는 철거민이 사망하셨는데도,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 줄 정부기관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용산참사 유가족의 인터뷰 기사로 마무리를 합니다.


용산참사 고(故) 양회성 씨 부인, "시신 공개해서라도 진상규명하겠다." 2009-01-31,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이빨도 없고, 손가락도 없고. 30년 넘게 산 내 남편을 알아보지 못했다. 불에 타 죽었으면 이빨이 없을 이유가 있냐. 손가락이 없을 이유가 있냐. 불에 타죽은 것이 아니라 맞아 죽은 것이다. 차라리 화재로 죽었으면 기도라도 막혔을텐데. 시신을 공개해서라도 진실을 찾겠다. 마음 같아선 이명박 대통령과 김석기 경찰청장을 내 남편과 똑같이 하고 싶다."

29일, 강제진압 현장에서 숨진 고(故) 양회성 씨의 부인 김영덕(55)씨가 가슴 속에 숨겨둔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남편을 또다시 죽일 수 없어 망설였던 시신 공개다.

▲고(故) 양회성 씨의 부인 김영덕(55)씨. 그는 "죽음의 원이 밝혀질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다"고 밝혔다.
ⓒ 이명박 정권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 제공

구청장이 '장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외친 세입자들을 '떼잡이'라고 불렀던가. 시신공개를 하면 '남편 팔아 돈 달라고하는 떼잡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들을지언정, 죽은게 원통해서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게 김 씨의 생각이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 남편이 죽은 걸 알았을 때 심정은?

"돈 없는게 원통했다. 짧으면 3개월을 생각하고 올라갔다. 장남한테, '아빠가 없으면 장남인 네가 가장 역할하라고, 집에 일찍 들어와 엄마 잘 살피라'고 말하며 이상하게 눈물을 흘렸다. 아이들한테 야단한번, 매한번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얼마나 올라가기 싫으면 저런 모습 보이겠나 싶어 가슴이 아팠다. 살아야해서, 먹고 살려고 올라갔는데, 이렇게 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양회성 씨 죽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는데?

"30년 넘게 산 내 남편을 알아보지 못했다.  불에 타죽은 것이 아니라 맞아죽은 것이다. 시신을 보면 안다. 불에 타 죽었으면 이빨이 없을 이유가 있냐. 손가락이 없을 이유가 있냐. 망루에서 함께 떨어졌다는 사람이 갑자기 죽었으니. 시신을 보면 안다. 오죽하면 시신을 공개할 생각을 하겠나. 죽은 사람을 또 죽일 생각을 했겠는가. 이대로 그냥 끝내기엔 남편의 죽음이 너무나 원통하다."

- 남편은 왜 옥상에 올라가게 되었나?

"있는 사람만 살게하고, 서민은 구렁텅이로 갈 수 밖에 없는 세상이다. 정부에서 서민을 위해 대출을 늘린다고 하는데, 정작 서민은 대출받을 길이 없다. 담보가 있어야하는데, 서민에게 담보가 어디있나.

실평수 100평 식당을 운영했다. 보증금, 권리금 줘서 2억 넘게 들였는데, 5000만원을 보상한다는 게 말이되는가. 5000만원으로 어디가서 장사하라는 이야기인가. 대화는 전혀 없었다. 건물주는 보증금도 주지 않았다. 보상금을 받지 않으면 보증금도 주지않겠다고 했다. 철거가 시작된 이후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월세도 못냈고, 보증금에서 빼면서 살았다. 건물주에게 보증금만이라도 제대로 돌려달라고 했는데, 그마저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 다음엔 용역들이 들어와서 나가라고 협박을 했다. 우리가 경찰, 시민에게 행패부릴려고 올라갔겠나.

마지막에는 임시로 장사할 수 있는 환경만이라도 만들어달라고 올라갔다. 없는 사람이 먹고 살려고 올라간 것인데, 이렇게 비참하게 죽을 수 없다. 마음 같아서는 이명박 대통령과 김석기 경찰청장을 내 남편과 똑같이 하고 싶다."

- 망루에서 남편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나?
 
"위원장(고 이상림 씨 아들, 현재 구속상태)이 봤다. 특공대가 쳐들어오자 우리 남편과 이상림 씨가 나서서 '대화로 하자'고 했다고 한다. 위원장이 '위험하니 피하라'고 했는데, '자기들은 나이가 있으니 먼저 대화를 하자고 했다'고 한다. 그랬던 남편이 죽었다."

(이날 부상자들은, 하나같이 '경찰의 폭력이 심했다'고 말했다. 한 부상자는 경찰에 맞아 기절을 했는데, 불길에 깨어났다고 한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하마터면 또 하나의 참사가 일어날 수 있던 순간이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유가족이 똘똘 뭉쳐 끝까지 싸울 것이다. 남편이 너무 비참하게 돌아갔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불쌍하다. 너무 고생만하다가, 죽음까지도 편하게 가지 못하고 비참하게 가게했다. 꼭 진상규명을 하겠다. 부디 남편이 이 세상보다 좋은 곳으로 가서 편안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것 밖에 없다.